내게 통영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은 아쉽게도 봄날이 아니라 가을이다. 남해바다에 내리쬐는 찬란한 봄 햇살이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태양 볕이 작렬했던 여름을 보내고, 온통 하늘이 파스텔톤으로 물들어가는 가을 하늘과 대비를 이루며 깊어가는 바다 빛깔은 충만한 행복감을 선물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올 가을은 속절없이 그냥 흘려보냈다. 여름에 출간이 집중된 세 권의 책을 만들고, 홍보하기 위해 방방곡곡을 뛰어다니느라 방전된 몸을 이끌고, 멀리 유럽까지 저자를 만나러 날아갔던 욕심이 화근이 되어 두어 달 골골 앓으며 10, 11월을 보낸 탓이었다. 6년 전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통영에 내려왔던 그 시절로 돌아갈까봐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다시 처음부터 내 삶을 복기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다시, 책을 들다
올해 1월 갑작스럽게 폐암 말기 선고를 받은 엄마를 입원 3주 만에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고, 나는 두어 달 갈 길을 놓고 울고 있었다. 그렇게 서울을 자주 오가면서도 바쁘단 핑계로 엄마 얼굴도 자주 못 보았던 것이 내내 사무치게 다가왔고, 내 부모한테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슨 좋은 책을 만들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인지, 다 그만둘까, 사람 노릇하면서 살려고 내려갔는데 이게 뭔가...... 이런저런 못난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방황의 터널 끝에서 어느 순간, 그럼에도 내 자리를 지키는 것, 내가 맡은 작은 일들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어렵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6, 7, 8월 한 달 간격으로 세 권의 책이 세상에 태어났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씨앗을 뿌리고, 비료를 주며, 추수할 가을을 기다렸다.

남해의봄날을 닮은 5권의 책들 
올해 남해의봄날은 독수리 5형제를 표방하며 전국 곳곳을 뛰어다니느라 다섯 권의 책밖에 출간하지 못했다. 연초 목표는 8권이었으나 역시 무리였다. 하지만 한 권 한 권이 우리에겐 너무나 중요한 책들이어서 그 무게감은 열 권에 육박할 만큼 컸다. 통영 동피랑의 기적부터 에코 아일랜드 연대도, 강구안 뒷골목 재생사업까지 통영을 유명 관광지로 만든 마을 활동가 윤미숙 국장의 <춤추는 마을 만들기>를 시작으로 본격 로컬 비즈니스 방법론을 담아 지역의 삶에 구체적 해법을 제시한 <제주에서 뭐 하고 살지?>와 <우리는 섬에서 미래를 보았다>가 그 뒤를 이었다. 특히 남해의봄날 첫 번역서로 출간된 섬미래는 우리들의 이야기와 너무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제작 과정 내내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 책이었다. 제주로 갈지, 통영으로 갈지 고민했던 우리가 만약 제주를 선택했더라면 어쩌면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었을 제주책 역시 특별한 책이었다. 부동산 투기로 생채기가 난 제주에서 그곳에 꼭 필요하지만 없는 스몰 비즈니스를 시작하며 지역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목표 삼은 삶의 방식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두 책은 많은 독자들이 그들의 삶에 대해 메일과 메시지로 많은 응원을 보낸 책이었다. 그리고 8월 5일 출간된 올해의 빅 타이틀,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는 남해의봄날을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만든 책이었다.

봉수골 작은 책방이 만들어낸 작은 기적
남해의봄날은 봉수골 작은 마을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작은 책방을 열었다. 네 평 남짓, 책장을 꽉 채워도 5백여 권밖에 들어가지 않는 책방은 통영의 문화예술을 알리는 아트하우스 봄날의집 안방을 개조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1년, 이 네 평짜리 동네 책방은 작은 기적을 만들어나갔다. 한 해 2천여 명이 넘는 방문자가 다녀갔고, 책방지기를 모집한다는 공고에 전국에서 지원자가 몰렸으며 놀랍게도 한 명의 인건비를 넉넉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책이 팔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방은 쇠락한 작은 마을의 사랑받는 참새방앗간이 되었다.



평생 단 한 번도 책방에 간 적이 없는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책방 문을 열고 들어와 박경리의 책을 사고, 매주 한 권씩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동네 꼬마들은 한참이나 작은 책방에서 그림책을 보면서 놀다가기를 여러 차례, 소문을 듣고 저 멀리 떨어진 동네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오는 부모들의 방문도 이어졌다. 서울은 물론 거제, 진주, 광주, 창원, 부산, 대구 등지에서 책방을 찾는 손님들도 꾸준히 늘어갔다. 그렇게 우리는 작은 책방이 이 작은 마을을 어떻게 바꾸어 가는지를 목도했고, 그것은 진짜 가슴 뛰는 경험이었다. 어쩌면 우리 같은 책방들이, 지역 곳곳에 실핏줄처럼 퍼져간다면, 지역의 문화적 갈급을 해소하고 새로운 소통의 중심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여러 생각이 스쳐갔다. 그런 단편적인 생각들은 충북 괴산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가정식 서점을 열어 50가구가 사는 시골마을에 정착한 백창화, 김병록 선생님의 연륜에서 우러난 조언과 아이디어에 힘입어 전국 작은 책방 이여기를 담는 책으로 발전하였고, 저자들은 1년여 전국 책방 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우리도 함께 동행했다.

전국 작은 책방들의 연대, 화제의 중심에 서다
동네서점이 하나둘 문을 닫고, 지역의 문화와 소통이 사라진 시대, 우리는 전국을 돌면서 꿈틀꿈틀 작은 희망을 보았다. 지역의 몇몇 책방들은 안목 높은 독자들의 취향을 파악한 감각있는 책방지기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진화하고 있었고, 개성적인 북리스트까지 더해져 조금씩 독자들과 접점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책이 안 팔린다고 참고서 판매에 더 집중하며 서점의 역할을 포기하다시피 한 일부 서점들에게도 새로운 자극이 되어 또 다른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었다. 우리는 이를 제대로 기록하고, 전하고, 작은 책방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연대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애썼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는 출간 직후 일주일 동안 전국 작은 책방에서만 판매하기로 결단! 작은 책방들이 힘을 모아 스스로를, 그리고 함께한 책방들을 세상에 알리는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 얼마나 많은 책방들이 이 책 한 권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는지, 그 과정을 함께하면서 변방의 작은 출판사는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책 한 권을 통한 놀라운 변화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처음에는 대형 서점의 외면을 받을까 내심 걱정도 했지만 출간 일주일 뒤 찾아간 대형 온오프 서점 MD들 역시 책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보내며 작은 책방들을 알리기 위해 함께 애써주었다. 책을 사랑하는 이들은 결국 한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우리도 더 열심히 홍보에 힘썼고, 출판 기자들 역시 이에 화답하며 많은 신문에 탑기사로 우리 책을 올림과 동시에 거의 전 서점 메인 화면 오늘의책을 장식하는 이변을 낳았다.

좋은 책은 힘이 세다!
작은 책방에서 큰 서점으로 이어진 연대, 좋은 책을 알리기 위한 기자들의 애정으로 책은 연일 화제의 중심에 섰고, 우리 책에서 처음 소개한 ‘북스테이’라는 새로운 책문화 공간의 실험은 SBS와 MBC 8시 뉴스에까지 보도되며 전국적인 북스테이 확산에 불을 당겼다. 그리고 3개월 동안 백창화, 김병록 두 분의 저자는 부상투혼까지 발휘하며 전국 동네서점 12곳을 순회하는 최장기 북콘서트를 이어갔다. 독자들이 열 명이든 백 명이든, 서점이 외딴 산골에 있든, 섬에 있든 개의치 않고 전국을 누볐고, 그 결과 8백여 명의 독자와 현장에서 직접 소통하는 기쁨을 얻었다. 그렇게 뜨겁게 보낸 여름과 가을, 두 계절이 지나는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이 괴산 저자의 책방과 통영 봄날의책방을 찾았다. 새로 동네 책방을 열고 싶다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책 나온 지 넉 달이 된 지금 증쇄를 위해 추가된 책방 리스트를 보니 족히 스무 군데가 넘었다. 우리가 모르는 곳까지 합하면 수십 군데의 책방이 그 사이 문을 열었고, 바로 지금 이 시간에도 새로운 책방지기들은 이 책을 들고 전국 책방을 여행하며 업계 동료들을 만나고, 함께 책을 팔고, 책을 사는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좋은 책은 힘이 세다는 것을, 좋은 책은 이렇게 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내는 소통의 메신저로서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음을 우리는 또 한 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과 우리의 생각을 나눌수록 행복해진다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가장 큰 기쁨이었다.  


통영 문화예술로 소통하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올해 우리가 거둔 또 하나의 의미있는 성과는 바로 지역의 책방을 통해 본격적으로 지역의 문화를 소통하기 시작했다는 점과 그 콘텐츠를 더 널리 알리기 위한 다양한 미디어를 제작했다는 것이다. 지난 해 완성한 <장인지도>는 올여름 독자들과 함께 직접 장인들의 공방을 체험하는 걷기 프로그램으로 이어졌고, 최근  박경리, 유치환, 김춘수 등 통영 문인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문학지도>까지 완성하여 내년 봄, 독자들과 함께하는 통영 문학기행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절친 이웃 전혁림미술관과 함께 통영의 대표화가, 문화예술계의 가장 큰 어른 전혁림 화백을 그의 아들 전영근 화백의 기억을 좇아 글과 그림으로 되살린 <그림으로 나눈 대화>를 로컬 아티스트 첫 책이자 올해의 마지막 책으로 출간했다. 우리가 통영에서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한 계기가 된 통영의 뛰어난 문화예술 자산을 이제 조금씩 세상에 알리고 나누기 위한 소통을 조심스럽게 시작한 것이다.



나눌수록 더 행복해지는 찬란한 삶의 비밀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돌아보니 올해는 그동안 낯선 땅에 뿌린 씨앗의 열매를 조금씩 거두기 시작한 한 해였다. 작은 책방을 통해 지역 독자들과 소통의 문을 열었고, 동네 김밥집과 단골 카페 사장님을 비롯 이웃집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동네 꼬마들이 함께 어울려서 축제 같은 북콘서트를 열어 지역과 더 한층 가까워졌다. 그 시간을 통해 마을이 하나가 되고, 가까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작은 행복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가장 찬란한 순간들과 만났다. 서울 깍쟁이란 소리를 들었던 나 역시 조금씩 얼굴에 웃음이 돌고, 낯가림도 덜해지면서 이웃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주고받을 만큼 그렇게 독이 빠지고 치유되어 가고 있으니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일까. 사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더 바라면 욕심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우리를 좋게 봐준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올해 나온 우리 책들이 거의 다 우수도서에 선정되고, 연말 조선일보와 한겨레, 매경, 프레시안 등 각 언론이 올해의 책으로 작은 책방책을 선정하는 등 좋은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정말 과분하고, 넘치는 일이다.



설레고 두렵기까지 했던 2015년, 우리는 책을 만들면서 조금씩 성장하고, 책 속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서 소통의 기쁨을 알아갔다. 그리고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책을 만들고, 파는 그 모든 과정들은 매번 흔들리는 우리 삶의 지향점을 다시 리셋하고, 꽃 피우게 하는 놀라운 훈련의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눌수록 더 행복해지는 삶의 비밀을 알아버린 2015년, 그 찬란했던 시간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글_남해의봄날 정은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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