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Local Travel에서는 통영길문화연대가 통영성에 대한 이야기를 깊이 있는 글과 생생한 사진으로 전합니다. 통영성을 따라 걷는 길은 세병관, 동피랑과 서피랑 등을 품고 있어 조선시대부터 근현대까지 통영의 역사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재미있는 길로 총 4회 걸쳐 소개합니다. |
이번에 걷는 통영성길은 통영성의 정문인 남문, 즉 청남루(淸南樓)에서 시작한다. 통영을 대표하는 전통시장인 중앙시장의 떠들썩한 한복판을 지나 벽화마을로 유명한 동피랑 정상 동포루(東鋪樓)에 오른 후, 조선 시대 화폐인 상평통보를 주조한 주전골에 도착하는 것으로 통영성길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창원, 김해, 하동의 장배가 몰려든 ‘싸전(米廛, 미전)’
통영 어딜 가나 자주 만나는 고지도가 있다. 1872년, 고종 9년에 제작한 통영지도다. 이 지도를 보면 통영성의 공간이 크게 두 가지 공간으로 나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세병관(洗兵館)으로 대변되는 군사도시의 면모다.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수군을 지휘하는 총본부, 삼도수군통제영의 정수가 바로 세병관이다. 이 세병관은 지금까지도 통영 사람들의 자긍심으로 남아있다. 또 다른 하나는 통영이 경제도시였음을 보여주는 남문 앞 ‘싸전(米廛, 미전)’이다. 통제영 휘하의 고을에서 쌀을 공물로 바쳤다하여 이름 붙었다. 곡창지대인 김해와 하동의 쌀과 창원의 철 등 특산물이 장배를 타고 통영의 싸전으로 몰려들었다. 이 장배들의 교류는 통영의 개방성을 보여준다. 오죽하면 ‘양반들도 원문성(원문고개)에 갓을 벗어두고는 통영에서 상업에 종사한다’는 말이 있겠는가!
이 싸전 자리가 바로 오늘날 ‘중앙시장’이다. 얼마 전까지도 통영을 중심으로 부산과 마산, 사천과 남해, 여수를 오가는 숱한 여객선과 화물선을 통해 사람과 물자가 중앙시장 앞으로 모였다. 이제는 통영의 섬과 바다에서 갓 잡은 신선한 수산물들이 중앙시장으로 집합한다. 전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은 오늘도 펄떡 펄떡 뛰는 생선, 특히 날이 차가워진 요즘에는 물메기며 볼락, 방어 등등 제철 생선을 저렴한 값에 맛보는 재미에 중앙시장을 찾는다.
동피랑 벽화마을이 품은 역사의 흔적
동피랑은 대부분 마을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를 보려 방문한다. 형형색색으로 칠해진 동피랑 곳곳에 실은 통영 근대의 역사가 생생하게 남아있다는 것을 아는가? 평소에는 모르고 지났지만 알고 보면 또 다른 의미가 있는 동피랑으로 안내하겠다.
일제강점기 통영에는 많은 일본인이 진출했다. 일본인들은 통영 곳곳에 자신들 신앙의 중심인 신사를 지었는데, 세병관보다 높은 곳에 지은 ‘통영 신사‘와 천주교 태평성당 자리에 있던 ‘동본 원사’, 그리고 동피랑 벽화마을 아래에도 신사가 있었다.
중앙시장 건어물 골목 끝 쪽에 ‘수월참기름’이 있다. 이 가게 옆에 동피랑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이 바로 통영성길이자 통영성벽이다. 그 꼭대기에 오르면 동그란 대문 기둥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일본 신사 앞에 세우는 ‘도리이(鳥居)’다. 하늘과 땅, 인간을 연결해주는 새가 앉는다는 곳이다. 오른쪽 기둥에는 ‘대정(大正)’이란 일본식 연호가, 왼쪽 기둥에는 ‘강산현 미감촌(岡山縣 美甘村)’이란 지명이 뚜렷하게 보인다. 강산현, 즉 오카야마는 큐슈, 히로시마와 함께 통영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의 주요 근거지였다. 이 신사는 일제가 패망하자 교회 건물로 쓰였다가 최근에는 개인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벽화마을로 유명해지기 전, 동피랑은 서피랑과 더불어 통영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달동네였다. 1895년, 고종 32년 통제영이 폐영된 후 관리가 안 돼 허물어진 동포루 주변 동피랑 일대에 6.25 피난민 등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동포루와 통영성벽 위에다 다닥다닥 집을 짓는 바람에 통영성벽은 이젠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졌다. 이곳에서 옛 통영성의 흔적을 찾기란 숨은 그림 찾기보다 어렵다. 동피랑에서 통영성 흔적을 찾는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바로 황룡 그림을 찾으라는 것이다. 황룡 그림이 통영성벽을 품고 있다. 동피랑 까망길에서 동포루로 올라가다보면 가정집 벽면을 따라 길게 용솟음치는 황룡을 만날 수 있다. 만약 지금 그 황룡을 보고 있다면, 발을 디딘 그 자리가 바로 통영성이다. 발아래를 한번 보시길. 통영성의 기초석이 보일 것이다.
동피랑 꼭대기 동피랑 점방 앞에서 500원 망원경으로 통영 시내 곳곳을 내려다 본 후 동문 자리로 향했다. 아쉽게도 통영에 4대문 가운데 단 하나의 문도 남아있질 않다. 위치가 궁금한 이라면 삼삼이발관의 ‘이발소 싸인볼’을 찾으면 된다. 추억에 젖어들게 하는 옛 모습 그대로의 이발관. 동문이 남아 있지 않음에 느꼈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는 이런 흔적들이 걷는 걸음을 멈춰 서게 하고 다시 걷고 싶게 한다.
그 골목길이 그리웠다
통영성길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내려와 통제영 당시 화폐인 상평통보를 주조한 ‘주전골’로 향한다. 통영을 잘 모르면, 이곳에서 처음 통영성 걷기를 시작한 남문 자리. 옛 봉래극장을 향해 큰 찻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면 된다. 통영 사람들에겐 “충무데파트 방향이 어디에요?”하고 물으면 다들 잘 안다.
최근 주전골에는 통영이 자랑하는 형제, 김용식과 김용익을 기념하는 ‘김용식 김용익 기념관’이 생겼다. 외무부 장관, 주영대사, 주미대사,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 등으로 활약한 형 김용식(1913-1995)은 ‘대한민국 외교계의 역사’라고 불린다. 대표작 <꽃신>, 미국 영문학 교과서에 수록된 <해녀>, <밤배> 등을 쓴 동생 김용익(1920~1995)은 ‘펜의 마술사’라고 불린다. 이 기념관에 들어선 순간 마음에 닿은 것은 관람 동선을 안내하는 안내 표시였다. 김용익이 노래한 시 꽃신의 이미지이다. 누가 이런 아이디어를 냈을까? 참 기발하다.
<쉬엄쉬엄 걸어서 만나는 통영성길> 연재를 마치며, 필자가 하고 싶은 말 역시 이 기념관에 있다.
‘나는 미국, 유럽의 하늘도 보고 산길도 걸었으나 고국 하늘, 고향 길이 늘 그리웠다.
돌과 풀 사이 쇠똥에 발이 빠졌던 그 골목길이 그리웠다.
나의 이야기는 내 밑바다에 깔린 고향에 대한 시감(詩感)이 원천이니 그것은 바로 나의 노래다.‘
-‘꽃신’ 첫머리, 1983년 동아일보-
통영길문화연대 cafe.daum.net/tytrekking 역사문화예술도시 통영을 걸어서 만나려는 비영리 시민단체. 통영은 빼어난 풍광과 더불어 곳곳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품고 문화 예술을 이끌고 있는 예향이다. 다도해를 품은 통영에는 526개의 섬이 있으며, 푸른 바다를 끼고 산새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다채로운 길들이 있다. 통영길문화연대는 2011년 9월부터 소규모 걷기 행사를 주관하고 있으며, 통영 곳곳의 아름다운 길을 찾아 시민들과 함께 걷고자 한다. 매월 첫째 주 금요일은 ‘통영성 걷기’, 둘째 주 금요일은 ‘섬길 걷기’, 셋째 주 금요일은 ‘쉬엄쉬엄 통영을 걷다’, 넷째 주 금요일엔 ‘산양읍을 걷다’, 격주 토요일에는 ‘토요 걷기’를 실시하고 있다. 걷기 행사는 누구나 참여 가능하다. |
통영人뉴스 www.tyinnews.com 통영人(in)뉴스는 통영 사람과 통영 속으로 뛰어드는 삶을 지향하는 언론 매체다. 통영의 한산신문에서 오랜 기간 근무하며 통영의 구석구석 이야기와 삶을 취재해온 김상현 기자가 2011년 7월 4일에 독립하여 만들었다. 그 누구보다 한 발 더 빠르게 지역의 이슈를 문자 메시지로 제공하고 있으며, 한 달간 홈페이지를 통해 보도한 내용을 정리한 월간지를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통영의 섬과 골목길, 길 곳곳에 피어있는 들꽃에 관한 이야기를 정기적으로 연재하고 있다. |
글.사진_통영人뉴스 김상현 기자(tyinnews@naver.com)
이번에 걷는 통영성길은 통영성의 정문인 남문, 즉 청남루(淸南樓)에서 시작한다. 통영을 대표하는 전통시장인 중앙시장의 떠들썩한 한복판을 지나 벽화마을로 유명한 동피랑 정상 동포루(東鋪樓)에 오른 후, 조선 시대 화폐인 상평통보를 주조한 주전골에 도착하는 것으로 통영성길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창원, 김해, 하동의 장배가 몰려든 ‘싸전(米廛, 미전)’
통영 어딜 가나 자주 만나는 고지도가 있다. 1872년, 고종 9년에 제작한 통영지도다. 이 지도를 보면 통영성의 공간이 크게 두 가지 공간으로 나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세병관(洗兵館)으로 대변되는 군사도시의 면모다.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수군을 지휘하는 총본부, 삼도수군통제영의 정수가 바로 세병관이다. 이 세병관은 지금까지도 통영 사람들의 자긍심으로 남아있다. 또 다른 하나는 통영이 경제도시였음을 보여주는 남문 앞 ‘싸전(米廛, 미전)’이다. 통제영 휘하의 고을에서 쌀을 공물로 바쳤다하여 이름 붙었다. 곡창지대인 김해와 하동의 쌀과 창원의 철 등 특산물이 장배를 타고 통영의 싸전으로 몰려들었다. 이 장배들의 교류는 통영의 개방성을 보여준다. 오죽하면 ‘양반들도 원문성(원문고개)에 갓을 벗어두고는 통영에서 상업에 종사한다’는 말이 있겠는가!
이 싸전 자리가 바로 오늘날 ‘중앙시장’이다. 얼마 전까지도 통영을 중심으로 부산과 마산, 사천과 남해, 여수를 오가는 숱한 여객선과 화물선을 통해 사람과 물자가 중앙시장 앞으로 모였다. 이제는 통영의 섬과 바다에서 갓 잡은 신선한 수산물들이 중앙시장으로 집합한다. 전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은 오늘도 펄떡 펄떡 뛰는 생선, 특히 날이 차가워진 요즘에는 물메기며 볼락, 방어 등등 제철 생선을 저렴한 값에 맛보는 재미에 중앙시장을 찾는다.
동피랑 벽화마을이 품은 역사의 흔적
동피랑은 대부분 마을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를 보려 방문한다. 형형색색으로 칠해진 동피랑 곳곳에 실은 통영 근대의 역사가 생생하게 남아있다는 것을 아는가? 평소에는 모르고 지났지만 알고 보면 또 다른 의미가 있는 동피랑으로 안내하겠다.
일제강점기 통영에는 많은 일본인이 진출했다. 일본인들은 통영 곳곳에 자신들 신앙의 중심인 신사를 지었는데, 세병관보다 높은 곳에 지은 ‘통영 신사‘와 천주교 태평성당 자리에 있던 ‘동본 원사’, 그리고 동피랑 벽화마을 아래에도 신사가 있었다.
중앙시장 건어물 골목 끝 쪽에 ‘수월참기름’이 있다. 이 가게 옆에 동피랑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이 바로 통영성길이자 통영성벽이다. 그 꼭대기에 오르면 동그란 대문 기둥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일본 신사 앞에 세우는 ‘도리이(鳥居)’다. 하늘과 땅, 인간을 연결해주는 새가 앉는다는 곳이다. 오른쪽 기둥에는 ‘대정(大正)’이란 일본식 연호가, 왼쪽 기둥에는 ‘강산현 미감촌(岡山縣 美甘村)’이란 지명이 뚜렷하게 보인다. 강산현, 즉 오카야마는 큐슈, 히로시마와 함께 통영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의 주요 근거지였다. 이 신사는 일제가 패망하자 교회 건물로 쓰였다가 최근에는 개인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벽화마을로 유명해지기 전, 동피랑은 서피랑과 더불어 통영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달동네였다. 1895년, 고종 32년 통제영이 폐영된 후 관리가 안 돼 허물어진 동포루 주변 동피랑 일대에 6.25 피난민 등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동포루와 통영성벽 위에다 다닥다닥 집을 짓는 바람에 통영성벽은 이젠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졌다. 이곳에서 옛 통영성의 흔적을 찾기란 숨은 그림 찾기보다 어렵다. 동피랑에서 통영성 흔적을 찾는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바로 황룡 그림을 찾으라는 것이다. 황룡 그림이 통영성벽을 품고 있다. 동피랑 까망길에서 동포루로 올라가다보면 가정집 벽면을 따라 길게 용솟음치는 황룡을 만날 수 있다. 만약 지금 그 황룡을 보고 있다면, 발을 디딘 그 자리가 바로 통영성이다. 발아래를 한번 보시길. 통영성의 기초석이 보일 것이다.
동피랑 꼭대기 동피랑 점방 앞에서 500원 망원경으로 통영 시내 곳곳을 내려다 본 후 동문 자리로 향했다. 아쉽게도 통영에 4대문 가운데 단 하나의 문도 남아있질 않다. 위치가 궁금한 이라면 삼삼이발관의 ‘이발소 싸인볼’을 찾으면 된다. 추억에 젖어들게 하는 옛 모습 그대로의 이발관. 동문이 남아 있지 않음에 느꼈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는 이런 흔적들이 걷는 걸음을 멈춰 서게 하고 다시 걷고 싶게 한다.
그 골목길이 그리웠다
통영성길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내려와 통제영 당시 화폐인 상평통보를 주조한 ‘주전골’로 향한다. 통영을 잘 모르면, 이곳에서 처음 통영성 걷기를 시작한 남문 자리. 옛 봉래극장을 향해 큰 찻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면 된다. 통영 사람들에겐 “충무데파트 방향이 어디에요?”하고 물으면 다들 잘 안다.
최근 주전골에는 통영이 자랑하는 형제, 김용식과 김용익을 기념하는 ‘김용식 김용익 기념관’이 생겼다. 외무부 장관, 주영대사, 주미대사,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 등으로 활약한 형 김용식(1913-1995)은 ‘대한민국 외교계의 역사’라고 불린다. 대표작 <꽃신>, 미국 영문학 교과서에 수록된 <해녀>, <밤배> 등을 쓴 동생 김용익(1920~1995)은 ‘펜의 마술사’라고 불린다. 이 기념관에 들어선 순간 마음에 닿은 것은 관람 동선을 안내하는 안내 표시였다. 김용익이 노래한 시 꽃신의 이미지이다. 누가 이런 아이디어를 냈을까? 참 기발하다.
<쉬엄쉬엄 걸어서 만나는 통영성길> 연재를 마치며, 필자가 하고 싶은 말 역시 이 기념관에 있다.
‘나는 미국, 유럽의 하늘도 보고 산길도 걸었으나 고국 하늘, 고향 길이 늘 그리웠다.
돌과 풀 사이 쇠똥에 발이 빠졌던 그 골목길이 그리웠다.
나의 이야기는 내 밑바다에 깔린 고향에 대한 시감(詩感)이 원천이니 그것은 바로 나의 노래다.‘
-‘꽃신’ 첫머리, 1983년 동아일보-
역사문화예술도시 통영을 걸어서 만나려는 비영리 시민단체. 통영은 빼어난 풍광과 더불어 곳곳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품고 문화 예술을 이끌고 있는 예향이다. 다도해를 품은 통영에는 526개의 섬이 있으며, 푸른 바다를 끼고 산새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다채로운 길들이 있다. 통영길문화연대는 2011년 9월부터 소규모 걷기 행사를 주관하고 있으며, 통영 곳곳의 아름다운 길을 찾아 시민들과 함께 걷고자 한다.
매월 첫째 주 금요일은 ‘통영성 걷기’, 둘째 주 금요일은 ‘섬길 걷기’, 셋째 주 금요일은 ‘쉬엄쉬엄 통영을 걷다’, 넷째 주 금요일엔 ‘산양읍을 걷다’, 격주 토요일에는 ‘토요 걷기’를 실시하고 있다. 걷기 행사는 누구나 참여 가능하다.
통영人(in)뉴스는 통영 사람과 통영 속으로 뛰어드는 삶을 지향하는 언론 매체다. 통영의 한산신문에서 오랜 기간 근무하며 통영의 구석구석 이야기와 삶을 취재해온 김상현 기자가 2011년 7월 4일에 독립하여 만들었다. 그 누구보다 한 발 더 빠르게 지역의 이슈를 문자 메시지로 제공하고 있으며, 한 달간 홈페이지를 통해 보도한 내용을 정리한 월간지를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통영의 섬과 골목길, 길 곳곳에 피어있는 들꽃에 관한 이야기를 정기적으로 연재하고 있다.
글.사진_통영人뉴스 김상현 기자(tyinnew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