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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봄날에서 펴낸 책과 작가, 그리고 회사 이야기를 소개한 언론 보도입니다

경남도민일보_낭만 멜로디 윤이상의 러브레터

namhaebomnal
2020-01-04
조회수 1175

1950·60년대 유학 중
아내에게 쓴 절절한 글
남해의 봄날에서 출간
애정·포부 가득 담겨

솔직히 윤이상의 음악은 편안하게 듣기 어렵다. 기괴한 음악은 아니지만, 굉장히 지적이고 추상적이다. 그가 스스로 표현했듯 이론적이고, 이지적이고, 낭만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보, 나의 마누라, 나의 애인>(남해의 봄날, 2019년 11월)에 실린 윤이상의 글은 달랐다. 여기에 담긴 그의 글은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멜로디다. 마치 글로 적은 악보 같다.

이 책은 1956년부터 1961년까지 프랑스 파리와 독일 베를린에 유학 중인 윤이상이 한국에 있는 아내 이수자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것이다. 윤이상의 직접 쓴 글이 출판된 것 자체가 처음이다.

사적인 편지이니 현대 음악의 거장이니 하는 평가에 가려져 있던 인간 윤이상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 담겼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나이 마흔에 떠난 유학길, 그 초반에 겪은 고생이며 자기 음악에 대한 확신과 새로운 음악에 대한 고민이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건 아내에 대한 사랑이다.

◇시대에 없던 사랑 꾼

윤이상과 아내 이수자는 둘 다 부산사범학교 교사였던 시절, 당시로는 드물게 연애결혼을 했다. 윤이상이 심하게 폐렴을 앓았기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라며 이수자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낭만적인 사랑이 현실을 이겼다.

"나의 마누라. 나는 지금도 간절히 생각하오. 우리가 결혼 전에 해운대에 갔을 때 갯바람은 따뜻한 우리의 젊은 머리카락을 뒤 헝클어 주었소. 멀리서 밀려온 물결은 우리의 옷자락을 적시려고 장난을 하였소. 나의 가슴은 뛰고 피는 전신을 달음박질했소. 우리는 조용한 해변의 바위틈에 바람을 피해 앉았소. 당신과 나는 해가 가는 줄도 배고픈 줄도 몰랐소. 오늘은 유달리 당신 그리움에 눈시울이 뜨겁소. 온종일 당신만을 생각하다가 거칠까 보오. 당신을 끝없이 사랑하는, 당신의 영세의 남편이 마음 밑바닥에서 그리움을 새겨 보내요. 뽀뽀를, 안녕! "(127쪽. 1958년 4월 26일 편지 중에서)

아무리 그렇더라도 1950년대에 이런 낯 간지러운 표현을 할 수 있는 남편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 그야말로 시대에 없던 사랑 꾼이다.

"여보, 당신이 편지를 늦게 내는 바람에 내가 화가 났소. 그래서 당신이 밉소."(90쪽, 1957년 8월 23일 편지 중에서)

때로 보채고, 화내며, 안달하면서도 아내 이수자에게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은 한결같이 뜨거운 사랑 표현으로 끝난다. 아마 떨어져 있었기에 더욱 그리웠을 테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이렇게 편지를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자기 음악에 대한 확신

윤이상은 1955년 그가 작곡한 '현악 4중주 제1번'과 '피아노 3중주' 두 작품으로 작곡가로서는 최초로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이때 받은 상금에 돈을 더 보태 1956년 프랑스 파리 국립음악원으로 유학을 간다. 유럽으로 가서야 비로소 자신이 걷던 이 현대음악이라는 길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확신한다.

"과연 나는 파리에 잘 왔다 싶소. 지금 우리나라에는 나의 작품 하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소. 지금도 학리적으로 따져서 공부하는 사람이 아직 없소. 그래서 나는 서양음악의 전통을 한국에 이식할 중대한 책임을 느끼면서 하루빨리 나의 길을 개척하려 하오." (46쪽, 1956년 12월 6일 편지 중에서)

자기만의 새로운 음악에 대한 그의 강한 확신은 서양사람들을 뛰어넘겠다는 결심에까지 이른다. 세계적인 현대음악 거장은 이렇게 탄생하게 된다.

"내가 생각한 이 길은 지금 현대음악의 막다른 골목을 타개하는 새로운 개척자가 될지 안될지는 아직은 미지수지반 아무튼 모든 학문이나 예술은 무에서부터 유를 찾아낸 것이며 나의 이 길은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아무튼 탐구해 보겠소. 그리고 꾸준히 노력해야 할 것을 새삼스레 느끼오." (206쪽, 1959년 5월 3일 편지 중에서)

하지만, 그는 여전히 가난한 나라의 유학생. 폐렴을 앓은 몸이었지만, 돈이 없어 밥을 굶는 때가 잦았다.

"당신에게 여태 말한 적이 없지만 사실은 나는 파리에서 돈이 떨어져서 밥을 굶을 때가 여러 번 있었소. 한번은 호텔을 전전하면서 돈 오기를 기다릴 때 식당 앞에까지 가서 표가 없어 도로 돌아오고 한지가 몇 번, 며칠 뒤에는 나의 얼굴이 부었었소. 모든 사람들이 묻는 것을 나는 감기가 들어서 기침을 해서 얼굴이 부었노라 했소. 그리고 헛기침을 했소." (229쪽, 1959년 9월 6일 편지 중에서)

◇가장 찬란한 날의 기록들

이 책에 담긴 편지들은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날들의 기록이다. 나이 많고 가난한 유학생이 유럽 사회에서 가능성을 확인하고, 결국 가능성을 실현했던 시절에 쓴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1958년은 8월 13일 베를린 국회의사당에서 초연한 '현악 사중주 1번'이 좋은 반응을 받으며 유럽 음악계에 당당하게 입성한다.

"1악장이 끝나자 박수가 나왔소. 2악장은 꿈만 같이 연주되었소. 2악장이 끝나자 다시 박수가 일어났소. 3악장은 어려운 데다가 연습 부족으로 좋은 연주를 하지 못하였소. 박력이 부족하고 템포가 느렸소. 2악장이 끝나고 박수가 사방에서 일자, 주최 측은 올라가 내가 한국인 작곡가라는 걸 설명했소. (중략) 정말 나의 생후 처음으로 맛보는 본격적인 연주이며, 본격적인 무대이며 또 본격적인 청중이었소. 나는 한없이 기쁘오." (146쪽, 1958년 8월 17일 편지 중에서)

이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1959년 현대음악 작곡가의 등용문으로 유명한 독일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제에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으로 큰 호평을 받으며 '한국에서 온 그 유명한 작곡가'의 삶이 시작된다.

그가 편지에 자주 쓴 우리나라 남쪽 바닷가에 소박한 집을 짓고 아내와 살고 싶다는 소망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이 편지가 쓰이는 동안 이후 계속될 현대음악가로서의 위대한 여정과 민족문제에 따른 엄청난 고통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편지에만 집중하면 좋을 것 같다. 아내를 누구보다 애틋하게 사랑했고, 자기 음악에 대한 확신과 서양을 뛰어넘겠다는 포부를 지닌 40대 초반의 이 젊은 사내를 만나는 것만으로 충분하게 가슴이 벅차 오기 때문이다.

"현악사중주는 성북동 대문 닫아걸고 건넛방 구들목에서 또는 아랫방에서 이불 둘러쓰고 만든 작품이오. 그때 당신은 내 옆에 있었고 나의 등을 어루만지고 그러고 나의 볼에 입맞추고 가곤 하였소.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때 내가 당신의 사랑 속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이오." (148쪽, 1958년 8월 17일 편지 중에서)


이서후 기자 (who@idomin.com)

기사 원문 보기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714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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