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의 땅이라 그런지 통영에서 나는 작물 중 유명한 건 손에 꼽을 정도다. 애초에 땅에서 짓는 농사의 규모가 크지 않은 탓이다. 그나마 요즘은 마늘을 주력 상품으로 밀고 있는 분위기인데, 옆 동네 남해 마늘의 위세가 워낙 대단하니 어떻게 될지는 예상을 하기 쉽지가 않다. 하지만 고구마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강화와 해남의 호박 고구마가 강세를 떨치고 있는 ‘고구마판’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욕지 고구마(통영 사람들의 발음으로는 ‘고매’)가 바로 통영의 몇 안 되는 농특산물이다.

풍요로운 바다, 척박한 땅의 섬 욕지도
언젠가 한 커뮤니티에 ‘작년 이맘 때 욕지도’라는 제목으로 사진들을 올렸는데, 밑에 달린 댓글들 중 몇몇은 “전국 순대지도 같이 욕에 대한 지도인 줄 알았네요.”라는 내용이었다. 그만큼 그 이름이 생경한 데다 ‘욕지’라는 말 자체가 그리 익숙하지 않은 조어이기 때문이었다.
욕지는 慾知, 즉 알고자 하는 욕구가 가득한 섬이라는 뜻인데, 소가야 시절 한 노승이 시자승을 데리고 연화도의 가장 높은 곳에 이르렀을 때, 수행하던 시자승이 섬을 가리키며 “저 섬은 무슨 섬입니까?”라고 묻자 “慾知島觀世尊島”라 대답한 데서 이름이 유래됐다고 한다. “알고자 하면 석가세존을 본 받으라”는 뜻으로 풀이된다는데, 지식이 일천한 데다 알고자 하는 의욕 역시 신라 비단처럼 얇디얇은 내가 그 깊은 뜻을 알 수는 없는 노릇. 하지만 깊은 도(道)를 모른다 해서 고구마의 맛까지 모르는 건 아니다.
욕지 고구마는 꽤나 독특한 맛이다. 고구마는 크게 밤고구마, 물고구마, 호박고구마로 나눌 수 있는데 욕지 고구마는 밤고구마와 물고구마의 중간 정도라 해야겠다. 밤고구마처럼 살이 단단하지만 지나치게 퍽퍽하지 않고 물고구마처럼 쉽게 넘어가지만 너무 무르지도 않다. 물론 당도야 호박고구마에 미치지 못하지만 고소함과 함께 분명히 달콤함이 느껴지는 맛이었다. 하지만 원래 욕지 고구마는 맛 때문에 재배되던 게 아니었다고 한다. 워낙에 섬이 척박한 터라 고구마가 아니면 사람이 먹고 살 무언가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선택이 바로 고구마였다는 뜻이다.
“욕지에서 자란 처녀는 쌀 서(세) 말도 못 먹고 시집 간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욕지는 먹을 게 부족한 곳이었다. 지금도 욕지도를 한 바퀴 돌아보면 논은 없고 거의 대부분 고구마밭이다. 남해 어업의 전진기지이긴 하지만 변변히 수확할 작물이 없던 사람들의 생명밭이기도 했던 그곳을, 올 가을엔 나 혼자 찾았다.

10월 초부터 11월 초까지가 제철인 욕지고구마!
평일임에도 욕지 선착장 부근은 북적였다. 날짜를 가리지 않는 행락객들과 낚시꾼들, 돌아오는 주말에 있을 축제 준비에 한창인 주민들까지 한 데 뒤섞여 있던 터라 나는 배에서 차를 내리자마자 도망이라도 치듯 해안도로를 타고 달렸다. 전국적으로 손꼽아 봐도 세 손가락 안에는 넉넉히 들어갈 풍광을 자랑하는 욕지도의 가장자리를 따라 삼십여 분 정도 느긋하게 달리다 보니 이제 붉은 살을 드러낸 밭이 보였다.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잘 구분되지 않는 이랑과 고랑 사이에서 무언가를 캐고 있는 것을 보니, 분명히 고구마밭이었다. 차를 세우고 밭으로 걸어가며 인사를 건넸다. 고구마를 캐시는 거냐 묻고는 요즘 고구마 가격이 어느 정도 되는지도 물었다.
“올해는 태풍이 와서 작년보다 작황이 좋지 않아요. 그나마 여기는 바람이 비껴가는 데라서 괜찮았지만 다른 데는 줄기부터 다 말라버렸으니까. 아마 전체 수확량을 놓고 보면 삼십 프로 정도는 줄었을 겁니다.”
그렇잖아도 이제 막 점심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다며 아직 식전이면 같이 한술 들자던 아저씨는 넉넉한 인상이었다. 그리고 갓 캐낸 고구마들도 아저씨를 닮아 알이 굵었다. 가만, 작년에 내가 샀던 건 이보다 작았는데.
“추석 전이나 십일월 중순 이후에 나오는 건 작아요. 그럼 맛이 없지. 지금부터(시월 초) 십일월 초까지 나오는 것들이 제일 맛이 좋고.”
어떻게 된 게 작년의 우리 부부는 바로 그 맛이 없는 시기에만 욕지 고구마를 구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이 떨어진다는 생각은 못했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욕지 고구마는 얼마나 맛이 있다는 뜻인가.

욕지고구마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
“쪄 먹는 것보다는 구워 먹는 게 나은데, 욕지도에 있는 바닷가 같은 데서 몽돌을 주워다 냄비 바닥에 깔고 구워 먹는 게 제일이지. 지금처럼 막 뽑아낸 거는 이틀 정도 후숙을 시키면 더 맛이 좋으니까 얼른 먹고 싶다고 해서 가자마자 먹지 말고 좀만 기다려요.”
내 외모로부터 표출되는 식욕을 알아챈 아저씨는 연신 “조금만 기다리라”며 상자의 꼭대기까지 고구마를 잔뜩 채워주셨다. 나는 그득해진 기분으로 다시 집에 돌아왔다.
용케도 이틀을 참아 냄비에 찌듯이 구운 고구마는 참 맛있었다. 단맛이 그리 강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고구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소함이 무엇보다 큰 특징이었는데, 어느 종자와 비교해도 우위를 점할 게 틀림없는 단단함도 풍미를 더하는 요소였다. 게다가 이렇게 육질이 좋은 고구마는 맛탕 등 다른 요리에 사용하기도 좋다는 데에, 그리고 곧 그렇게 해먹자는 데에 나와 아내는 생각을 같이 했다. 물론 찌고 튀기고 설탕물을 만들고 준비된 고구마를 거기에 볶는 과정을 감수할 마음이 생기기까지는 좀 더 오랜 시간이 지나야겠지만 말이다.
*일부 해수욕장에서는 무분별한 몽돌 반출로 해수욕장 지형이 훼손되어 몽돌 반출이 금지되고 있다.
글.사진_정환정(j1446@naver.com)
바다의 땅이라 그런지 통영에서 나는 작물 중 유명한 건 손에 꼽을 정도다. 애초에 땅에서 짓는 농사의 규모가 크지 않은 탓이다. 그나마 요즘은 마늘을 주력 상품으로 밀고 있는 분위기인데, 옆 동네 남해 마늘의 위세가 워낙 대단하니 어떻게 될지는 예상을 하기 쉽지가 않다. 하지만 고구마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강화와 해남의 호박 고구마가 강세를 떨치고 있는 ‘고구마판’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욕지 고구마(통영 사람들의 발음으로는 ‘고매’)가 바로 통영의 몇 안 되는 농특산물이다.
풍요로운 바다, 척박한 땅의 섬 욕지도
언젠가 한 커뮤니티에 ‘작년 이맘 때 욕지도’라는 제목으로 사진들을 올렸는데, 밑에 달린 댓글들 중 몇몇은 “전국 순대지도 같이 욕에 대한 지도인 줄 알았네요.”라는 내용이었다. 그만큼 그 이름이 생경한 데다 ‘욕지’라는 말 자체가 그리 익숙하지 않은 조어이기 때문이었다.
욕지는 慾知, 즉 알고자 하는 욕구가 가득한 섬이라는 뜻인데, 소가야 시절 한 노승이 시자승을 데리고 연화도의 가장 높은 곳에 이르렀을 때, 수행하던 시자승이 섬을 가리키며 “저 섬은 무슨 섬입니까?”라고 묻자 “慾知島觀世尊島”라 대답한 데서 이름이 유래됐다고 한다. “알고자 하면 석가세존을 본 받으라”는 뜻으로 풀이된다는데, 지식이 일천한 데다 알고자 하는 의욕 역시 신라 비단처럼 얇디얇은 내가 그 깊은 뜻을 알 수는 없는 노릇. 하지만 깊은 도(道)를 모른다 해서 고구마의 맛까지 모르는 건 아니다.
욕지 고구마는 꽤나 독특한 맛이다. 고구마는 크게 밤고구마, 물고구마, 호박고구마로 나눌 수 있는데 욕지 고구마는 밤고구마와 물고구마의 중간 정도라 해야겠다. 밤고구마처럼 살이 단단하지만 지나치게 퍽퍽하지 않고 물고구마처럼 쉽게 넘어가지만 너무 무르지도 않다. 물론 당도야 호박고구마에 미치지 못하지만 고소함과 함께 분명히 달콤함이 느껴지는 맛이었다. 하지만 원래 욕지 고구마는 맛 때문에 재배되던 게 아니었다고 한다. 워낙에 섬이 척박한 터라 고구마가 아니면 사람이 먹고 살 무언가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선택이 바로 고구마였다는 뜻이다.
“욕지에서 자란 처녀는 쌀 서(세) 말도 못 먹고 시집 간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욕지는 먹을 게 부족한 곳이었다. 지금도 욕지도를 한 바퀴 돌아보면 논은 없고 거의 대부분 고구마밭이다. 남해 어업의 전진기지이긴 하지만 변변히 수확할 작물이 없던 사람들의 생명밭이기도 했던 그곳을, 올 가을엔 나 혼자 찾았다.
10월 초부터 11월 초까지가 제철인 욕지고구마!
평일임에도 욕지 선착장 부근은 북적였다. 날짜를 가리지 않는 행락객들과 낚시꾼들, 돌아오는 주말에 있을 축제 준비에 한창인 주민들까지 한 데 뒤섞여 있던 터라 나는 배에서 차를 내리자마자 도망이라도 치듯 해안도로를 타고 달렸다. 전국적으로 손꼽아 봐도 세 손가락 안에는 넉넉히 들어갈 풍광을 자랑하는 욕지도의 가장자리를 따라 삼십여 분 정도 느긋하게 달리다 보니 이제 붉은 살을 드러낸 밭이 보였다.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잘 구분되지 않는 이랑과 고랑 사이에서 무언가를 캐고 있는 것을 보니, 분명히 고구마밭이었다. 차를 세우고 밭으로 걸어가며 인사를 건넸다. 고구마를 캐시는 거냐 묻고는 요즘 고구마 가격이 어느 정도 되는지도 물었다.
“올해는 태풍이 와서 작년보다 작황이 좋지 않아요. 그나마 여기는 바람이 비껴가는 데라서 괜찮았지만 다른 데는 줄기부터 다 말라버렸으니까. 아마 전체 수확량을 놓고 보면 삼십 프로 정도는 줄었을 겁니다.”
그렇잖아도 이제 막 점심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다며 아직 식전이면 같이 한술 들자던 아저씨는 넉넉한 인상이었다. 그리고 갓 캐낸 고구마들도 아저씨를 닮아 알이 굵었다. 가만, 작년에 내가 샀던 건 이보다 작았는데.
“추석 전이나 십일월 중순 이후에 나오는 건 작아요. 그럼 맛이 없지. 지금부터(시월 초) 십일월 초까지 나오는 것들이 제일 맛이 좋고.”
어떻게 된 게 작년의 우리 부부는 바로 그 맛이 없는 시기에만 욕지 고구마를 구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이 떨어진다는 생각은 못했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욕지 고구마는 얼마나 맛이 있다는 뜻인가.
욕지고구마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
“쪄 먹는 것보다는 구워 먹는 게 나은데, 욕지도에 있는 바닷가 같은 데서 몽돌을 주워다 냄비 바닥에 깔고 구워 먹는 게 제일이지. 지금처럼 막 뽑아낸 거는 이틀 정도 후숙을 시키면 더 맛이 좋으니까 얼른 먹고 싶다고 해서 가자마자 먹지 말고 좀만 기다려요.”
내 외모로부터 표출되는 식욕을 알아챈 아저씨는 연신 “조금만 기다리라”며 상자의 꼭대기까지 고구마를 잔뜩 채워주셨다. 나는 그득해진 기분으로 다시 집에 돌아왔다.
용케도 이틀을 참아 냄비에 찌듯이 구운 고구마는 참 맛있었다. 단맛이 그리 강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고구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소함이 무엇보다 큰 특징이었는데, 어느 종자와 비교해도 우위를 점할 게 틀림없는 단단함도 풍미를 더하는 요소였다. 게다가 이렇게 육질이 좋은 고구마는 맛탕 등 다른 요리에 사용하기도 좋다는 데에, 그리고 곧 그렇게 해먹자는 데에 나와 아내는 생각을 같이 했다. 물론 찌고 튀기고 설탕물을 만들고 준비된 고구마를 거기에 볶는 과정을 감수할 마음이 생기기까지는 좀 더 오랜 시간이 지나야겠지만 말이다.
*일부 해수욕장에서는 무분별한 몽돌 반출로 해수욕장 지형이 훼손되어 몽돌 반출이 금지되고 있다.
글.사진_정환정(j144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