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는 꽤 큰 섬이다. 물론 거제 옆 동네 통영으로 이사를 오기 전에도 국내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느끼는 감상은, 문자로만 이루어진 문장 몇 줄로 전해지는 것과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규모가 제법 되는 곳이다 보니 생산되는 작물 역시 다양하다. 그 중 대표적인 게 포도와 표고버섯, 유자 등. 그리고 또 한 가지가 바로 죽순이다. 사실 죽순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담양이었다. 워낙에 대나무가 유명한 고장이니까. 그래서 거제에서 죽순이 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리고 예전에는 작지 않은 규모의 죽순 통조림 가공 공장까지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 사실을 금방 납득할 수가 없었다. 이러저러한 일 때문에 거제를 오가는 동안 한번도 죽림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내가 대나무숲을 피해(?) 다녔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거제 시내에 가거나 거가대교를 이용하기 위해 고현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잡는 게 일반적이었기에 맹종죽이 자라고 있는 하청면으로는 갈 일이 없었던 게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먼 곳도 아니었다. 집에서 출발하면 대략 한 시간 정도. 서울에서라면 겨우 편도 출퇴근길에 소요되는 시간이었기에 나와 아내는 직접 죽순을 캐는 상상을 하며 5월 초를 기다렸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맹종죽 군락지로 향한 것은 6월이 가까워지던 어느 주말이었다. 여리고 향이 좋은 죽순의 채취가 모두 끝난.
바다가 보이는 거제 맹종죽 테마파크
맹종죽이 자라고 있는, 지금은 아예 맹종죽 테마파크라는 이름으로 단장된 대밭은 규모가 꽤나 있는 곳이었다. 물론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얻고 있는 담양의 죽녹원에 비하자면 그리 큰 규모는 아닐 수 있었지만 어쨌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온통 대나무만 들어찬 산이 있다는 건 꽤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매표소까지 올라가는 길이 이상할 정도로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게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맹종죽은 대나무의 한 종류인데, 많은 수의 작물이 그러하듯 전설을 한 가지 갖고 있다. 중국 삼국시대에 살던 맹종이라는 한 효자가 오랫동안 병을 앓던 어머니를 위해 한겨울에 눈 쌓인 대밭에서 눈물을 흘리며 죽순을 찾던 중, 효심에 감동한 하늘이 그가 눈물을 흘린 자리에 죽순을 돋게 만들어줬고 그것으로 죽을 끓여 어머니를 구완하자 그동안 앓고 있던 병도 씻은 듯 나았다는 이야기다. 사실 중국만 아니라 동북아시아 어느 나라에나 어울릴 법한 이야기다. 한국의 경우에는 ‘내 다리 내놔’로 변형되어 좀 더 극적이고 스릴 넘치는 이야기로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지만 말이다.
어쨌든 맹종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 이 대나무의 원산지는 중국이었다. 그러던 것이 일본으로 옮겨져 재배되었고 한국의 누군가가 일본에서부터 이식해 거제에서 재배하기 시작했단다. 한국에서 자라고 있는 왕죽, 분죽, 오죽 등에 비해 죽순의 모양이 좋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가장 먼저 수확되기 때문에 봄 소식을 전할 때 혹은 대밭을 소개할 때 가장 많이 노출시키는 것 역시 맹종죽이었다. 하지만 맹종죽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중국과 수교를 체결하고 무역이 자유로워지면서 값싼 중국산이 밀려들었다. 거제의 죽순 통조림 공장 역시 이런 이유 때문에 문을 닫았다.
그러니 흔치 않게 접하게 되는 죽순의 맛은 모두 신선하지 못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수 년 전 담양에서 업무 차 죽순요리 풀코스를 배가 터지게 먹었던 내 입장에서는 그러한 ‘인스턴트 죽순’이 마뜩잖던 게 당연한 일. 게다가 죽순은 향으로 먹는 것이기에 기계적 가공을 거친 것들은 원래의 가치를 잃을 수밖에 없다. 미묘하고 오묘한 그 푸른 향은 결코 깡통 속에 담길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내 관심은, 아직 좀 더 성장해야 할 여지가 많이 보이는 테마파크보다는 인근에서 판매하는 죽순에 더 많이 쏠려 있었다.
신선한 푸른 향의 죽순, 제대로 즐기는 법
“죽순이 얼마나 빨리 자라냐면, 땅에서 캔 것도 그대로 두면 계속 커요. 그러면 맛이 떨어지지. 그래서 바로 삶아야 하는데, 이걸 대량으로 처리하는 데에서는 대용량 찜기에 넣고 찌거든요. 그러면 떫은맛이 안 빠져요. 펄펄 끓는 물에 넣고 삶아야지. 그래야 단맛만 남거든.”
테마파크 바로 앞에 위치한 농장에서는 이미 죽순 수확이 끝났기 때문에 죽순 캐기 체험은 할 수 없고 포장해놓은 죽순만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마당에 걸어놓은 가마솥에서 푹 삶은 거란다. 그렇다면 그런 죽순은 어떻게 먹는 게 좋을까?
“생선 조릴 때 같이 넣어 먹어도 좋고 고기를 찔 때 넣어도 좋고 튀김에 곁들이는 것도 좋고. 죽순이야 어떻게 먹든 맛있으니까.”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설명하는 아주머니로부터 죽순 1킬로그램을 9천 원에 샀다. 우선은 닭볶음탕-난 이 근본 없는 ‘볶음탕’이라는 말을 굉장히 싫어한다. 볶음이면 볶음이고 탕이면 탕이지 볶음탕은 어느 나라의 요리법이란 말인가. 닭도리탕의 ‘도리’라는 말이 일본어 도리とり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닭볶음탕이 맞다는 국립국어원의 준엄한 가르침이 있었지만, 그렇다면 윗도리와 아랫도리는 윗새, 아랫새란 말인가. 나는 그동안 새를 입고 생활을 했다는 말인가?! 왜 도리가 ‘조각’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는 주목하지 않는지 이유를 모르겠다-에 넣어 먹어볼 요량이었다.
은은하고도 향긋한 최고의 천연조미료, 죽순
죽순 닭볶음탕을 만드는 방법은 굉장히 쉽다. 일반적인 닭볶음탕에 죽순을 넣어주기만 하면 끝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매콤한 닭볶음탕이 갑자기 대지의 향기와 봄의 기운을 가득 담은 요리로 재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평소보다는 담백해진다. 무엇보다 고기와 함께 먹는 죽순의 향이 좋다. 보통 닭볶음탕에는 감자와 당근, 양파 등이 들어가기 때문에 닭이 아닌 채소를 먹어도 퍽퍽한 기운이 입안에서 사라지지 않지만 죽순의 향긋한 향은 무거워진 혀를 되살리는 데에 더 없이 좋은 역할을 한다. 그러니 아무 런 손질도 하지 않고 먹기 좋게 잘라놓은 죽순을 조금 묽게 만든 간장에 찍어먹으면 그 향이 훨씬 더 좋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죽순의 향을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요리를 꼽자면 단연 된장찌개다. 된장 역시 향이 강한 재료이기 때문에 죽순이 묻힐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죽순과 된장은 굉장히 잘 어울리는 파트너다. 된장 특유의 진한 내음에 지지 않고 청명한 향을 내는 국물은 의외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 정도. 텁텁한 맛 때문에 된장찌개를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죽순을 넣어 먹는다면 분명히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과학적으로야 어떤 작용을 하는지 내가 알 길이 없지만 죽순과 함께 끓인 된장찌개는 훨씬 맑은 맛이 난다. 하지만 고추장과의 만남은 가급적이면 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고추장 자체는 강한 향을 갖고 있지 않지만 그것을 먹음으로써 발생하는 통증-매운맛은 통증이다-이 죽순향을 감상하려는 후각까지 마비시키기 쉬우니까. 그러니 괜히 죽순에 고추장 양념을 범벅해, 아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마늘에 쪽파에 양파, 미나리까지 넣어 만드는 회무침 따위는 죽순의 진짜 맛을 느끼는 것을 방해하는 요리법일 수밖에.
죽순 덕분에 며칠 동안 나와 아내는 향기로운 밥상을 즐길 수 있었다. 우리가 죽순을 구입한 농장 아주머니의 말에 따르면, 냉동을 하면 반 년 동안은 보관할 수 있다고 했지만 될 수 있는 한 빨리 죽순을 먹었다. 무엇과 함께 먹어도 좋은 맛이었으니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을 다 먹고 나면 다시 내년 봄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는 했다. 그래도 이제 우리 부부에게 무엇인가 다시 제철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일은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다. 어떤 것이 사라지는 것은 모든 것이 순리대로 돌아가고 있음을 알리는 징표이기도 하니 말이다. 봄비가 내리면 죽순이 자라기 시작하는 것처럼.
글.사진_정환정(j1446@naver.com) <서울 부부의 남해 밥상> 에서 발췌
거제는 꽤 큰 섬이다. 물론 거제 옆 동네 통영으로 이사를 오기 전에도 국내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느끼는 감상은, 문자로만 이루어진 문장 몇 줄로 전해지는 것과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규모가 제법 되는 곳이다 보니 생산되는 작물 역시 다양하다. 그 중 대표적인 게 포도와 표고버섯, 유자 등. 그리고 또 한 가지가 바로 죽순이다. 사실 죽순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담양이었다. 워낙에 대나무가 유명한 고장이니까. 그래서 거제에서 죽순이 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리고 예전에는 작지 않은 규모의 죽순 통조림 가공 공장까지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 사실을 금방 납득할 수가 없었다. 이러저러한 일 때문에 거제를 오가는 동안 한번도 죽림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내가 대나무숲을 피해(?) 다녔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거제 시내에 가거나 거가대교를 이용하기 위해 고현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잡는 게 일반적이었기에 맹종죽이 자라고 있는 하청면으로는 갈 일이 없었던 게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먼 곳도 아니었다. 집에서 출발하면 대략 한 시간 정도. 서울에서라면 겨우 편도 출퇴근길에 소요되는 시간이었기에 나와 아내는 직접 죽순을 캐는 상상을 하며 5월 초를 기다렸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맹종죽 군락지로 향한 것은 6월이 가까워지던 어느 주말이었다. 여리고 향이 좋은 죽순의 채취가 모두 끝난.
바다가 보이는 거제 맹종죽 테마파크
맹종죽이 자라고 있는, 지금은 아예 맹종죽 테마파크라는 이름으로 단장된 대밭은 규모가 꽤나 있는 곳이었다. 물론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얻고 있는 담양의 죽녹원에 비하자면 그리 큰 규모는 아닐 수 있었지만 어쨌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온통 대나무만 들어찬 산이 있다는 건 꽤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매표소까지 올라가는 길이 이상할 정도로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게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맹종죽은 대나무의 한 종류인데, 많은 수의 작물이 그러하듯 전설을 한 가지 갖고 있다. 중국 삼국시대에 살던 맹종이라는 한 효자가 오랫동안 병을 앓던 어머니를 위해 한겨울에 눈 쌓인 대밭에서 눈물을 흘리며 죽순을 찾던 중, 효심에 감동한 하늘이 그가 눈물을 흘린 자리에 죽순을 돋게 만들어줬고 그것으로 죽을 끓여 어머니를 구완하자 그동안 앓고 있던 병도 씻은 듯 나았다는 이야기다. 사실 중국만 아니라 동북아시아 어느 나라에나 어울릴 법한 이야기다. 한국의 경우에는 ‘내 다리 내놔’로 변형되어 좀 더 극적이고 스릴 넘치는 이야기로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지만 말이다.
어쨌든 맹종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 이 대나무의 원산지는 중국이었다. 그러던 것이 일본으로 옮겨져 재배되었고 한국의 누군가가 일본에서부터 이식해 거제에서 재배하기 시작했단다. 한국에서 자라고 있는 왕죽, 분죽, 오죽 등에 비해 죽순의 모양이 좋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가장 먼저 수확되기 때문에 봄 소식을 전할 때 혹은 대밭을 소개할 때 가장 많이 노출시키는 것 역시 맹종죽이었다. 하지만 맹종죽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중국과 수교를 체결하고 무역이 자유로워지면서 값싼 중국산이 밀려들었다. 거제의 죽순 통조림 공장 역시 이런 이유 때문에 문을 닫았다.
그러니 흔치 않게 접하게 되는 죽순의 맛은 모두 신선하지 못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수 년 전 담양에서 업무 차 죽순요리 풀코스를 배가 터지게 먹었던 내 입장에서는 그러한 ‘인스턴트 죽순’이 마뜩잖던 게 당연한 일. 게다가 죽순은 향으로 먹는 것이기에 기계적 가공을 거친 것들은 원래의 가치를 잃을 수밖에 없다. 미묘하고 오묘한 그 푸른 향은 결코 깡통 속에 담길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내 관심은, 아직 좀 더 성장해야 할 여지가 많이 보이는 테마파크보다는 인근에서 판매하는 죽순에 더 많이 쏠려 있었다.
신선한 푸른 향의 죽순, 제대로 즐기는 법
“죽순이 얼마나 빨리 자라냐면, 땅에서 캔 것도 그대로 두면 계속 커요. 그러면 맛이 떨어지지. 그래서 바로 삶아야 하는데, 이걸 대량으로 처리하는 데에서는 대용량 찜기에 넣고 찌거든요. 그러면 떫은맛이 안 빠져요. 펄펄 끓는 물에 넣고 삶아야지. 그래야 단맛만 남거든.”
테마파크 바로 앞에 위치한 농장에서는 이미 죽순 수확이 끝났기 때문에 죽순 캐기 체험은 할 수 없고 포장해놓은 죽순만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마당에 걸어놓은 가마솥에서 푹 삶은 거란다. 그렇다면 그런 죽순은 어떻게 먹는 게 좋을까?
“생선 조릴 때 같이 넣어 먹어도 좋고 고기를 찔 때 넣어도 좋고 튀김에 곁들이는 것도 좋고. 죽순이야 어떻게 먹든 맛있으니까.”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설명하는 아주머니로부터 죽순 1킬로그램을 9천 원에 샀다. 우선은 닭볶음탕-난 이 근본 없는 ‘볶음탕’이라는 말을 굉장히 싫어한다. 볶음이면 볶음이고 탕이면 탕이지 볶음탕은 어느 나라의 요리법이란 말인가. 닭도리탕의 ‘도리’라는 말이 일본어 도리とり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닭볶음탕이 맞다는 국립국어원의 준엄한 가르침이 있었지만, 그렇다면 윗도리와 아랫도리는 윗새, 아랫새란 말인가. 나는 그동안 새를 입고 생활을 했다는 말인가?! 왜 도리가 ‘조각’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는 주목하지 않는지 이유를 모르겠다-에 넣어 먹어볼 요량이었다.
은은하고도 향긋한 최고의 천연조미료, 죽순
죽순 닭볶음탕을 만드는 방법은 굉장히 쉽다. 일반적인 닭볶음탕에 죽순을 넣어주기만 하면 끝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매콤한 닭볶음탕이 갑자기 대지의 향기와 봄의 기운을 가득 담은 요리로 재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평소보다는 담백해진다. 무엇보다 고기와 함께 먹는 죽순의 향이 좋다. 보통 닭볶음탕에는 감자와 당근, 양파 등이 들어가기 때문에 닭이 아닌 채소를 먹어도 퍽퍽한 기운이 입안에서 사라지지 않지만 죽순의 향긋한 향은 무거워진 혀를 되살리는 데에 더 없이 좋은 역할을 한다. 그러니 아무 런 손질도 하지 않고 먹기 좋게 잘라놓은 죽순을 조금 묽게 만든 간장에 찍어먹으면 그 향이 훨씬 더 좋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죽순의 향을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요리를 꼽자면 단연 된장찌개다. 된장 역시 향이 강한 재료이기 때문에 죽순이 묻힐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죽순과 된장은 굉장히 잘 어울리는 파트너다. 된장 특유의 진한 내음에 지지 않고 청명한 향을 내는 국물은 의외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 정도. 텁텁한 맛 때문에 된장찌개를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죽순을 넣어 먹는다면 분명히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과학적으로야 어떤 작용을 하는지 내가 알 길이 없지만 죽순과 함께 끓인 된장찌개는 훨씬 맑은 맛이 난다. 하지만 고추장과의 만남은 가급적이면 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고추장 자체는 강한 향을 갖고 있지 않지만 그것을 먹음으로써 발생하는 통증-매운맛은 통증이다-이 죽순향을 감상하려는 후각까지 마비시키기 쉬우니까. 그러니 괜히 죽순에 고추장 양념을 범벅해, 아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마늘에 쪽파에 양파, 미나리까지 넣어 만드는 회무침 따위는 죽순의 진짜 맛을 느끼는 것을 방해하는 요리법일 수밖에.
죽순 덕분에 며칠 동안 나와 아내는 향기로운 밥상을 즐길 수 있었다. 우리가 죽순을 구입한 농장 아주머니의 말에 따르면, 냉동을 하면 반 년 동안은 보관할 수 있다고 했지만 될 수 있는 한 빨리 죽순을 먹었다. 무엇과 함께 먹어도 좋은 맛이었으니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을 다 먹고 나면 다시 내년 봄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는 했다. 그래도 이제 우리 부부에게 무엇인가 다시 제철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일은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다. 어떤 것이 사라지는 것은 모든 것이 순리대로 돌아가고 있음을 알리는 징표이기도 하니 말이다. 봄비가 내리면 죽순이 자라기 시작하는 것처럼.
글.사진_정환정(j1446@naver.com) <서울 부부의 남해 밥상> 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