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지도를 대표하는 특산물로 고등어가 언급될 정도라면, 과연 욕지도에선 고등어를 얼마나 많이 잡는 것일까? 1920년대부터 동력선으로 된 고등어잡이 건착선이 욕지도 앞바다에 출현했다. 당시엔 소형 그물을 손으로 던져 몇 마리 고기를 건져 올리는 수조망이나 그물을 그 자리에 몇 시간 담가 두었다가 걷어 올려 자루 속에 갇힌 고기를 주워 담는 안강망 방식이 고작이었다. 그러다 건착선이 등장 하면서 고등어잡이는 대규모 조업으로 급변했다. 고등어가 그물에 갇히면 그물의 끈을 조여서 고등어가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데, 이렇게 끈을 조였다 풀었다 하는 주머니가 ‘건착’이다. 이 건착을 이용하여 대형 선박 두 척이 아예 큰 그물로 고등어 떼를 둘러싸 통째로 잡아 올리는 건착망은 획기적이면서 혁명적인 조업법이었다. 일제 강점기 건착선은 150~200통 불배, 그물배, 운반선으로 구성된 선단. 두 척이 그물을 함께 펼쳐 고등어를 잡는 어선이 500척, 운반 선이 290척에 달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욕지도 앞바다엔 고등어가 밀집 회유했다. 고등어를 따라 전국의 건착선이 몰려들면, 컴컴하던 밤바다가 대낮처럼 환한 날이 며칠이고 이어졌다.
부엌의 진화, 섬의 문화를 담근 간독
고등어가 많이 잡히다 보니 욕지도에선 자연스레 간고등어도 발달하였다. 냉장고와 같은 저장 방법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산지인 욕지도에서 고등어가 제아무리 대풍이어도 신선도를 유지한 채 소비지로 가져가기가 어려웠다. 김흥국(55) 욕지 면지 편찬위원회 상임위원에게 간고등어에 대해 자세히 물어 보았다.
“그 시절 냉장고가 있었시모, 간고등어는 웁섰을끼라요. 지도에는 일제 강점기에도 얼음 저장 창고가 있을 정도였죠. 그래도 얼음은 금덩어리처럼 귀한 물건이라. 그 많은 고등어를 신선도 유지할끼라꼬 얼음을 쓴다는 거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그래서 오래 저장할라꼬 소금을 쓴 기지요.”
이렇게 간을 한 고등어는 짜도 웬만큼 짠 게 아니었다.
“얼매나 짠 지 그냥은 못 묵어요. 간고등어는 쌀뜨물에 담 가 놨다가 소금기가 빠져서 싱거워져야 구워 묵는 기라. 소금 간이 덜 빠지모 아이고 말도 마이소. 입안이 얼매나 근질근질 하다꼬. 참기가 애러봐요, 애러봐. 여하튼 소금 간은 짭짤해야 돼요. 그래야 오래 저장도 되고 맛도 난다 아입니까.”
간고등어를 만들기 위해선 소금도 중요했지만, 고등어를 저장할 공간도 필요했다.
“간독이라꼬 고등어를 소금 간해 갖고 묻어 두는 독아지가 있지요. 욕지도 바닷가 집치고 간독 웁는 집이 웁섰지요. 고등어 확보가 관건이라요. 욕지도 고등어 파시생선 시장은 들어봤지예? 고등어 잡는 배가 밤에는 고등어를 한그쓱 잡고, 낮에는 욕지항에 들어옵니다. 그때 선원들과 주민들 사이에 물물 교환이 일어나는 기지요.”
아직 간독의 흔적이 남은 곳이 있다는 말에 발걸음을 옮긴다. 욕지도에서 간독이 가장 많았던 곳은 자부랑개 자부포 마을. 통영~욕지 간 여객선이 닿는 동항리에서 채 10분도 안 걸릴 만큼 가깝다.
욕지도, 특히 자부랑개마을에는 집집마다 간독이 있었다. 간독은 크기도 형태도 다양했다. 중매인뿐만 아니라 가정집에도 간독을 파묻었다. 뗏마 동력이 없는 작은 배 에서 고등어를 사거나 선원들과 고구마로 맞바꾸던 욕지도 사람들은 부엌에 간독을 만들었다. 아궁이 옆 땔감을 모아둔 자리, 그 아래 흙을 파내고 시멘트로 간독을 만들어 넣은 형태였다. 양이 적은 경우에는 항아리를 쓰기도 했다. 마치 수백, 수천의 포기김치를 항아리에 담아 흙 속에 넣고 겨우내 꺼내 먹는 김장독처럼. 이렇게 대량으로 저장한 욕지도 간고등어는 어디로 팔렸을까? 가까운 통영이야 당연하고, 가장 많이 팔려 나간 곳은 마산이었다. 1899년 개항한 마산은 일제 강점기 삼남 물류의 중심지였다. ‘안동 간고등어의 원조가 욕지도’라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욕지도에서 선박으로 운송된 간고등어는 마산에서 육로를 따라 안동은 물론 전국으로 뻗어 나갔다. 욕지도 간고등어는 해로를 따라 시모노세키를 통해 일본 전역은 물론 저 멀리 대만까지 운송됐다. 기차, 트럭에 실려 육로를 따라 서울, 저 멀리 만주에까지 팔려 나갔다.
김임욱 욕지노인회장이 돛을 단 풍선을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가던 시절을 떠올린다.
“무동력선인 풍선에 염장한 간고등어를 싣고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밀물일 때는 바닷물 조류 따라 같이 올라가고. 썰물이모 닻을 놔서 멈추는 기라. 사천, 하동, 구례. 멀리 갈 때는 보성, 벌교꺼정 갔지. 욕지도는 쌀이 귀한깨, 쌀 폴모 제일이라. 고등어를 염장할 독아지도 바깠지. 그땐 돈은 웁고 순 물물 교환이라.”
위기를 기회로 바꾼 고등어 양식
1968년 정부는 욕지도를 어항시설과 냉동, 유통 기능을 갖춘 ‘어업전진기지’로 지정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때부터 욕지도에선 고등어 대풍 소식이 뚝 끊겼다. 바로 남획으로 욕지도 앞바다에서 고등어가 자취를 감춘 것이다. 조업기술이 발달하고 선박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더 멀리서 고등어 어군을 발견하고 고등어보다 더 빨리 쫓아가, 한꺼번에 더 많이 잡을 수 있게 됐다. 결국 고등어의 씨가 마른 것이다.
남획은 어제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1920~30년대 욕지도의 고등어 대풍 소식을 전한 신문들조차 다른 지면에서는 남획 문제를 지적했을 정도였다. 여기에 지구온난화로 높아진 수온도 고등어의 회유로를 바꿨다. 고등어 떼는 욕지도에서 추자도로, 추자도에서 제주도로 멀어져만 갔다. 요즘에는 아예 제주도 남쪽에서 고등어가 잡힌다. 욕지도 고등어가 부활한 것은 30년 후의 일이다. 2002년 욕지도 고등어 5톤이 일본으로 수출됐다. 그것도 소금 간을 친 간고등어가 아닌 살아 있는 활고등어로. 2005년에는 서울 등 대도시에 펄떡거리는 고등어가 횟감으로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횟감용 고등어의 등장이었다.
주인공은 어업인 홍순진(56) 씨. 1993년 아일랜드 해외 연수에서 습득한 기술과 자신의 경험을 살려 ‘원형 내파성 가두리’ 양식 시설을 욕지도에 처음으로 도입했다. 욕지도는 원래 높은 파도와 빠른 조류로 고등어의 양식에 적합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강한 태풍으로 인해 그 누구도 가두 리 시설을 설치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를 바람과 파도에 강한 원형 내파성 가두리 시설로 극복해낸 것이다. 또 바늘 모양 같은 침으로 고등어를 기절시킨 후 운송하여 대도시 횟집에서 다시 침으로 회복시켜 횟감으로 썰어 내는 방법도 고안해냈다. 홍순진 씨의 성공에 용기를 낸 다른 욕지도 어업인들도 하나둘 고등어 양식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축적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최근에는 ‘생선의 왕’ 참다랑어 양식의 꿈도 영글고 있다.
어머니의 사랑, 고등어
저녁이면 고등어 굽는 냄새가 욕지도 온 섬에 진동한다. 고등어는 반찬거리가 귀하던 시절 제일 흔한 식재료기도 했다. 고등어 배를 가르다 보면 아가미가 조금 잘리거나 뼈가 부러져서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파치, 즉 불량이 나온다. 이 고등어를 일꾼 아지매들이 집으로 가져가 저녁 반찬으로 올렸다.
“고등어 굽는 냄새가 골목골목, 집집마다 피어올랐지요. 불 때는 아궁이 알지예. 장작이 이글이글 타고 나모 불덩어리를 조금 덜냅니다. 그라모 가늘고 연한 불이 되는데, 그걸 욕지에선 ‘먼불’이라 캅니다. 그 먼불에 석쇠 사이에 넣은 고등 어를 굽십니다. 지글지글 육즙이 나오고 노릇노릇 굽히는 기라. 육즙이 너무 마이 빠져 삐모 퍼석해서 맛이 웁고, 덜 굽히모 지방질이 너무 많아 무립니다. 고등어 맛은 결국 어무이 손맛 아입니까. 고등어구이가 저녁 밥상에 오리모, 밥 몇 공기는 뚝딱이었죠.”
‘어머니와 고등어’라는 노래처럼 고등어구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상징하는 반찬이다. 고등어 굽는 연기가 골목마다 피 어오르던 욕지도, 그 연기를 타고 어머니의 사랑이 섬 전체에 퍼졌으리라.
욕지도에서 먹는 고등어 요리에는 고등어구이나 고등어 조림 외에도 고등어 내장 젓갈에 싱싱한 고등어회 등이 있다. 고등어회는 초장이나 고추냉이에 찍어 먹는 일반회와 달리 생강소스에 찍어 먹는다. 게다가 회를 뜨는 방법도 여느 회와는 다르다. 욕지도에서 한 고등어회 전문점을 운영하는 곽금식(63) 씨를 방문했다.
“지금은 자연산 고등어를 잡아서 가두리에서 키워서 회로 먹어요. 부가가치가 엄청 높아졌죠. 하지만 고등어회에도 약점이 있어요. 원래 고등어가 비린내가 많이 나고 독성이 있어요. 게다가 살이 물러서 잘못 요리하면 흐물흐물해요. 그래서 고등어회 조리법이 매우 중요하죠. 먼저 고등어 살과 뼈를 발라서 소금물에 간을 한 번 합니다. 다음에 찬물에 넣어 두었다가 얼음을 넣은 식초에 담가둡니다. 산 고등어가 회로 나올 때까지 30분 정도 걸려요. 이 조리법을 통해 고등어 체내의 독성도 빠지고 육질도 단단해지죠. 고등어를 초장이나 된장처럼 기존 소스에 찍어 먹어 봤더니, 맛이 안나요. 어렵사리 살려서, 정성 들여 회로 썰어냈는데 말이죠. 도전과 실패를 거듭한 끝에 10여 가지 양념이 들어간 소스를 개발했어요. 벌꿀, 간장, 와사비 등등. 여기에 찧은 생강을 올려 먹으면 비릿한 맛을 잡아 주고, 고등어회의 달콤한 맛을 입안 전체에 더 퍼지게 하죠.”
고등어회의 역사는 짧지만, 횟감용으로 쓸 수 있을 만큼의 신선도를 유지하는 기술의 발견과 맛을 내기 위한 노력은 결코 짧다 하지 못할 것이다.
글.사진_김상현 <통영 섬 부엌 단디 탐사기>에서 발췌
욕지도를 대표하는 특산물로 고등어가 언급될 정도라면, 과연 욕지도에선 고등어를 얼마나 많이 잡는 것일까? 1920년대부터 동력선으로 된 고등어잡이 건착선이 욕지도 앞바다에 출현했다. 당시엔 소형 그물을 손으로 던져 몇 마리 고기를 건져 올리는 수조망이나 그물을 그 자리에 몇 시간 담가 두었다가 걷어 올려 자루 속에 갇힌 고기를 주워 담는 안강망 방식이 고작이었다. 그러다 건착선이 등장 하면서 고등어잡이는 대규모 조업으로 급변했다. 고등어가 그물에 갇히면 그물의 끈을 조여서 고등어가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데, 이렇게 끈을 조였다 풀었다 하는 주머니가 ‘건착’이다. 이 건착을 이용하여 대형 선박 두 척이 아예 큰 그물로 고등어 떼를 둘러싸 통째로 잡아 올리는 건착망은 획기적이면서 혁명적인 조업법이었다. 일제 강점기 건착선은 150~200통 불배, 그물배, 운반선으로 구성된 선단. 두 척이 그물을 함께 펼쳐 고등어를 잡는 어선이 500척, 운반 선이 290척에 달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욕지도 앞바다엔 고등어가 밀집 회유했다. 고등어를 따라 전국의 건착선이 몰려들면, 컴컴하던 밤바다가 대낮처럼 환한 날이 며칠이고 이어졌다.
부엌의 진화, 섬의 문화를 담근 간독
고등어가 많이 잡히다 보니 욕지도에선 자연스레 간고등어도 발달하였다. 냉장고와 같은 저장 방법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산지인 욕지도에서 고등어가 제아무리 대풍이어도 신선도를 유지한 채 소비지로 가져가기가 어려웠다. 김흥국(55) 욕지 면지 편찬위원회 상임위원에게 간고등어에 대해 자세히 물어 보았다.
“그 시절 냉장고가 있었시모, 간고등어는 웁섰을끼라요. 지도에는 일제 강점기에도 얼음 저장 창고가 있을 정도였죠. 그래도 얼음은 금덩어리처럼 귀한 물건이라. 그 많은 고등어를 신선도 유지할끼라꼬 얼음을 쓴다는 거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그래서 오래 저장할라꼬 소금을 쓴 기지요.”
이렇게 간을 한 고등어는 짜도 웬만큼 짠 게 아니었다.
“얼매나 짠 지 그냥은 못 묵어요. 간고등어는 쌀뜨물에 담 가 놨다가 소금기가 빠져서 싱거워져야 구워 묵는 기라. 소금 간이 덜 빠지모 아이고 말도 마이소. 입안이 얼매나 근질근질 하다꼬. 참기가 애러봐요, 애러봐. 여하튼 소금 간은 짭짤해야 돼요. 그래야 오래 저장도 되고 맛도 난다 아입니까.”
간고등어를 만들기 위해선 소금도 중요했지만, 고등어를 저장할 공간도 필요했다.
“간독이라꼬 고등어를 소금 간해 갖고 묻어 두는 독아지가 있지요. 욕지도 바닷가 집치고 간독 웁는 집이 웁섰지요. 고등어 확보가 관건이라요. 욕지도 고등어 파시생선 시장은 들어봤지예? 고등어 잡는 배가 밤에는 고등어를 한그쓱 잡고, 낮에는 욕지항에 들어옵니다. 그때 선원들과 주민들 사이에 물물 교환이 일어나는 기지요.”
아직 간독의 흔적이 남은 곳이 있다는 말에 발걸음을 옮긴다. 욕지도에서 간독이 가장 많았던 곳은 자부랑개 자부포 마을. 통영~욕지 간 여객선이 닿는 동항리에서 채 10분도 안 걸릴 만큼 가깝다.
욕지도, 특히 자부랑개마을에는 집집마다 간독이 있었다. 간독은 크기도 형태도 다양했다. 중매인뿐만 아니라 가정집에도 간독을 파묻었다. 뗏마 동력이 없는 작은 배 에서 고등어를 사거나 선원들과 고구마로 맞바꾸던 욕지도 사람들은 부엌에 간독을 만들었다. 아궁이 옆 땔감을 모아둔 자리, 그 아래 흙을 파내고 시멘트로 간독을 만들어 넣은 형태였다. 양이 적은 경우에는 항아리를 쓰기도 했다. 마치 수백, 수천의 포기김치를 항아리에 담아 흙 속에 넣고 겨우내 꺼내 먹는 김장독처럼. 이렇게 대량으로 저장한 욕지도 간고등어는 어디로 팔렸을까? 가까운 통영이야 당연하고, 가장 많이 팔려 나간 곳은 마산이었다. 1899년 개항한 마산은 일제 강점기 삼남 물류의 중심지였다. ‘안동 간고등어의 원조가 욕지도’라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욕지도에서 선박으로 운송된 간고등어는 마산에서 육로를 따라 안동은 물론 전국으로 뻗어 나갔다. 욕지도 간고등어는 해로를 따라 시모노세키를 통해 일본 전역은 물론 저 멀리 대만까지 운송됐다. 기차, 트럭에 실려 육로를 따라 서울, 저 멀리 만주에까지 팔려 나갔다.
김임욱 욕지노인회장이 돛을 단 풍선을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가던 시절을 떠올린다.
“무동력선인 풍선에 염장한 간고등어를 싣고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밀물일 때는 바닷물 조류 따라 같이 올라가고. 썰물이모 닻을 놔서 멈추는 기라. 사천, 하동, 구례. 멀리 갈 때는 보성, 벌교꺼정 갔지. 욕지도는 쌀이 귀한깨, 쌀 폴모 제일이라. 고등어를 염장할 독아지도 바깠지. 그땐 돈은 웁고 순 물물 교환이라.”
위기를 기회로 바꾼 고등어 양식
1968년 정부는 욕지도를 어항시설과 냉동, 유통 기능을 갖춘 ‘어업전진기지’로 지정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때부터 욕지도에선 고등어 대풍 소식이 뚝 끊겼다. 바로 남획으로 욕지도 앞바다에서 고등어가 자취를 감춘 것이다. 조업기술이 발달하고 선박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더 멀리서 고등어 어군을 발견하고 고등어보다 더 빨리 쫓아가, 한꺼번에 더 많이 잡을 수 있게 됐다. 결국 고등어의 씨가 마른 것이다.
남획은 어제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1920~30년대 욕지도의 고등어 대풍 소식을 전한 신문들조차 다른 지면에서는 남획 문제를 지적했을 정도였다. 여기에 지구온난화로 높아진 수온도 고등어의 회유로를 바꿨다. 고등어 떼는 욕지도에서 추자도로, 추자도에서 제주도로 멀어져만 갔다. 요즘에는 아예 제주도 남쪽에서 고등어가 잡힌다. 욕지도 고등어가 부활한 것은 30년 후의 일이다. 2002년 욕지도 고등어 5톤이 일본으로 수출됐다. 그것도 소금 간을 친 간고등어가 아닌 살아 있는 활고등어로. 2005년에는 서울 등 대도시에 펄떡거리는 고등어가 횟감으로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횟감용 고등어의 등장이었다.
주인공은 어업인 홍순진(56) 씨. 1993년 아일랜드 해외 연수에서 습득한 기술과 자신의 경험을 살려 ‘원형 내파성 가두리’ 양식 시설을 욕지도에 처음으로 도입했다. 욕지도는 원래 높은 파도와 빠른 조류로 고등어의 양식에 적합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강한 태풍으로 인해 그 누구도 가두 리 시설을 설치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를 바람과 파도에 강한 원형 내파성 가두리 시설로 극복해낸 것이다. 또 바늘 모양 같은 침으로 고등어를 기절시킨 후 운송하여 대도시 횟집에서 다시 침으로 회복시켜 횟감으로 썰어 내는 방법도 고안해냈다. 홍순진 씨의 성공에 용기를 낸 다른 욕지도 어업인들도 하나둘 고등어 양식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축적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최근에는 ‘생선의 왕’ 참다랑어 양식의 꿈도 영글고 있다.
어머니의 사랑, 고등어
저녁이면 고등어 굽는 냄새가 욕지도 온 섬에 진동한다. 고등어는 반찬거리가 귀하던 시절 제일 흔한 식재료기도 했다. 고등어 배를 가르다 보면 아가미가 조금 잘리거나 뼈가 부러져서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파치, 즉 불량이 나온다. 이 고등어를 일꾼 아지매들이 집으로 가져가 저녁 반찬으로 올렸다.
“고등어 굽는 냄새가 골목골목, 집집마다 피어올랐지요. 불 때는 아궁이 알지예. 장작이 이글이글 타고 나모 불덩어리를 조금 덜냅니다. 그라모 가늘고 연한 불이 되는데, 그걸 욕지에선 ‘먼불’이라 캅니다. 그 먼불에 석쇠 사이에 넣은 고등 어를 굽십니다. 지글지글 육즙이 나오고 노릇노릇 굽히는 기라. 육즙이 너무 마이 빠져 삐모 퍼석해서 맛이 웁고, 덜 굽히모 지방질이 너무 많아 무립니다. 고등어 맛은 결국 어무이 손맛 아입니까. 고등어구이가 저녁 밥상에 오리모, 밥 몇 공기는 뚝딱이었죠.”
‘어머니와 고등어’라는 노래처럼 고등어구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상징하는 반찬이다. 고등어 굽는 연기가 골목마다 피 어오르던 욕지도, 그 연기를 타고 어머니의 사랑이 섬 전체에 퍼졌으리라.
욕지도에서 먹는 고등어 요리에는 고등어구이나 고등어 조림 외에도 고등어 내장 젓갈에 싱싱한 고등어회 등이 있다. 고등어회는 초장이나 고추냉이에 찍어 먹는 일반회와 달리 생강소스에 찍어 먹는다. 게다가 회를 뜨는 방법도 여느 회와는 다르다. 욕지도에서 한 고등어회 전문점을 운영하는 곽금식(63) 씨를 방문했다.
“지금은 자연산 고등어를 잡아서 가두리에서 키워서 회로 먹어요. 부가가치가 엄청 높아졌죠. 하지만 고등어회에도 약점이 있어요. 원래 고등어가 비린내가 많이 나고 독성이 있어요. 게다가 살이 물러서 잘못 요리하면 흐물흐물해요. 그래서 고등어회 조리법이 매우 중요하죠. 먼저 고등어 살과 뼈를 발라서 소금물에 간을 한 번 합니다. 다음에 찬물에 넣어 두었다가 얼음을 넣은 식초에 담가둡니다. 산 고등어가 회로 나올 때까지 30분 정도 걸려요. 이 조리법을 통해 고등어 체내의 독성도 빠지고 육질도 단단해지죠. 고등어를 초장이나 된장처럼 기존 소스에 찍어 먹어 봤더니, 맛이 안나요. 어렵사리 살려서, 정성 들여 회로 썰어냈는데 말이죠. 도전과 실패를 거듭한 끝에 10여 가지 양념이 들어간 소스를 개발했어요. 벌꿀, 간장, 와사비 등등. 여기에 찧은 생강을 올려 먹으면 비릿한 맛을 잡아 주고, 고등어회의 달콤한 맛을 입안 전체에 더 퍼지게 하죠.”
고등어회의 역사는 짧지만, 횟감용으로 쓸 수 있을 만큼의 신선도를 유지하는 기술의 발견과 맛을 내기 위한 노력은 결코 짧다 하지 못할 것이다.
글.사진_김상현 <통영 섬 부엌 단디 탐사기>에서 발췌